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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의 명성과 가야금 연주
우륵(于勒)의 거문고 연주는 한국 음악사에서 매우 유명했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과 조선의 박연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123.
우륵의 음악 실력은 그 당시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가야금을 연주할 때 그 소리가 산골에 정정 울렸다하여 그곳을 정정골로 명명하였다고 합니다4. 또한 **가야금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금곡(琴谷)**이라고도 불렸습니다4.
우륵과 악기의 관계: 가야금과 거문고의 차이
흥미롭게도 가야금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문고는 고구려의 왕산악이 제작한 악기입니다35. 우륵이 연주한 악기는 가야금이었고, 이는 가야국의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모방해 12현의 가야금을 만든 후,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 12악곡을 짓도록 한 것입니다1.
가야금과 거문고의 차이점
두 악기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륵의 12곡과 음악적 성취
우륵은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위한 12곡을 작곡했습니다18. 이 12곡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가라도(下加羅都) - 현재의 김해 지방
- 상가라도(上加羅都) - 현재의 고령 지방
- 보기(寶伎)
- 달기(達己) - 현재의 예천군 다인 지방
- 사물(思勿) - 현재의 사천 지방
- 물혜(勿慧) - 현재의 함안군 이안 지방
- 하기물(下奇物) - 현재의 금릉군 개령 지방
- 사자기(師子伎)
- 거열(居烈) - 현재의 거창 지방
- 사팔혜(沙八兮) - 현재의 함천군 초계 지방
- 이사(爾赦)
- 상기물(上奇物) - 현재의 금릉군 개령 지방910
이 12곡의 대부분은 당시 가야 지역의 지명을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각 지방의 민요나 향토색 짙은 음악을 가야금 곡으로 편곡한 것으로 추측됩니다911.
신라로의 망명과 음악 전파
우륵의 신라 망명 배경
548년 또는 549년 무렵 대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제자 이문(尼文)과 함께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했습니다1213. 이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가야국이 멸망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음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깊은 고민의 결과였습니다1415.
진흥왕과의 만남
551년 3월, 신라 진흥왕이 낙성(현재의 청주)에서 순행하다가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하림궁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게 했습니다12. 진흥왕은 그들의 연주에 감동하여 우륵을 국원(현재의 충주)에 거주하게 하고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세 사람을 보내어 음악을 배우게 했습니다128.
제자들의 음악 개혁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우륵의 세 제자들은 스승이 전수한 12곡을 "번잡하고 음란하다"며 5곡으로 줄여버렸습니다216. 우륵은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제자들이 편곡한 5곡을 들어본 후에는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아정하다"고 감탄했습니다12.
충주 탄금대: 우륵의 음악 활동 무대
탄금대의 유래
충주시 칠금동에 위치한 탄금대(彈琴臺)는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1718. 해발 108m의 나즈막한 산으로,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경치가 매우 수려한 곳입니다1819.
우륵은 고독하거나 여가가 있을 때는 항상 돌 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다고 전해지며, 그 오묘한 음률에 젖어들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1419.
숨겨진 이야기와 문화적 의미
우륵의 음악관과 철학
가실왕은 우륵에게 12곡을 만들게 하면서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820. 이는 지역별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통합을 추구하는 음악관을 보여줍니다.
음악의 정치적 의미
신라 조정에서는 처음에 "가야를 망친 망국의 음악 따위는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라며 가야악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간언했습니다1. 그러나 진흥왕은 **"가야왕이 음란해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는가"**라며 음악 자체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121.
음악가로서의 종합 예술성
우륵은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라 종합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습니다9. 이는 6세기 가야금 음악이 악기, 노래, 춤이 결합된 종합 무대예술의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9.
현대적 계승과 기념
우륵문화제
충주시에서는 1971년부터 매년 우륵문화제를 개최하여 우륵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2223. 이 축제는 우륵, 김생, 신립, 강수, 임경업 등 다섯 명현의 얼과 뜻을 기리는 예술 문화 행사로 발전했습니다23.
우륵박물관
경상북도 고령군에는 우륵박물관이 설립되어 가야금을 창제한 우륵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2425.
결론
우륵의 거문고 연주는 실제로는 가야금 연주였지만, 그의 음악적 업적은 한국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는 단순한 연주자를 넘어서 음악을 통해 문화를 전승하고 발전시킨 종합 예술가였으며, 망국의 위기 속에서도 예술의 가치를 지키고 전파한 문화 수호자였습니다.
특히 제자들이 스승의 곡을 개혁한 것을 인정한 일화는 예술의 창조적 발전을 수용하는 열린 마음을 보여주며, 이는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륵의 음악은 지역적 특색을 존중하면서도 통합을 추구하는 문화 정책의 선구적 모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