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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 고려는 인종(仁宗)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이 해는 송나라 사신단의 대규모 파견이 이루어진 해로, 이를 통해 당시 고려와 송나라 간의 외교적 관계와 국제 정세를 엿볼 수 있다.
국내 정권 상황
1. 왕권과 외척의 권력 갈등
1123년 당시 고려의 왕은 인종으로, 그는 1122년에 즉위하여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인종 즉위 당시 왕실 외척인 인주 이씨 가문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문종 이후 약 80년간 왕실 외척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그 권력이 점차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1126년 발생한 이자겸의 난으로 폭발하게 된다. 이자겸은 궁궐을 불태우고 왕권을 유린했으나, 인종은 결국 그를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하였다.



2. 정치적 개혁 시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제2 수도인 서경(현재 평양)을 자주 방문하며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였다. 그는 서경에 대화궁을 건설하고 묘청 및 정지상 등 서경 세력과 협력하여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국제 관계와 외교
1. 송나라와의 외교
1123년 송나라 휘종 황제는 대규모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하였다. 송나라는 고려로 파견할 사신단을 위해 민간 상선(객주) 6척을 임대하고, 새로 건조한 대형 선박(신주) 2척을 포함해 총 8척의 선단을 구성했다. 사신단 규모는 공식 인원 158명과 선원 약 720명을 포함해 총 878명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규모였다.
송나라에서 고려로 가는 항로는 위험천만했으며, '고려도경'에는 항해 중 겪은 위기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극심한 멀미와 신체적 고통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다.
송나라는 여진족이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세력을 키우자 거란(요나라)과 금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휘종 황제는 이러한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려를 새로운 연대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 이는 거란과 금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고려와 송나라는 광종 시기부터 비교적 친선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주변 세력의 부상으로 관계가 복잡해졌다. 송은 고려를 확실히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외교적 '한방'을 노렸다.
사절단에는 서긍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는 고려에서 한 달간 머물며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책 고려도경을 작성했다. 이 책은 당시 고려의 문물과 예의를 높게 평가하며 송 황제에게 바쳐졌다.
2. 여진족과의 관계
여진족이 강성해지면서 금나라가 1115년에 건국되었고, 이는 동북아시아 정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고려는 금나라와 형제 관계를 맺으며 거란과의 외교를 사실상 단절했다. 여진족과의 갈등 속에서 고려는 국경 방어를 강화하려 했으나, 군사적 열세로 인해 9개 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는 화평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송나라 사신단 파견의 의의
강봉룡 교수는 송나라의 두 차례 대규모 사신단 파견(1078년과 1123년)이 모두 외교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조선술과 항해술에서 획기적인 진보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이는 해양기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동아시아 해양 외교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된다.

송나라 사신단 파견은 단순한 외교 활동을 넘어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송이 고려와 연대를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선단 구성과 항해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외교적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동아시아 해양 기술과 외교사의 중요한 사례로 남았다.
고려도경의 역사적 가치
서긍은 송나라 사신단 일원으로 한달쯤 고려에 머무르며 당시 고려의 문물과 예의를 기록한 고려도경을 저술했다. 이 책은 당시 고려 사회와 문화, 외교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경향신문 기자의 경우는 서긍이 고려를 염탐하러 온 간첩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간첩만큼 대상을 자세히 살피는 존재도 없을 것이므로 어떤 면에서든 고려를 세밀하게 관찰했다는 점에서는 고려도경에서 착목할 만한 것이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문화적 평가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를 "문물과 예의를 갖춘 나라"로 평가하며, 당대 동아시아에서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던 국가로 묘사했다. 이는 고려가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문화적 위상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결론
1123년 고려는 인종의 통치 아래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외척 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국제적으로는 금나라와 송나라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인종은 왕권 강화와 개혁을 시도하며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또한 송나라 사신단 파견은 단순히 양국 간 외교 사건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해양 기술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고려도경이라는 기록물을 통해 당시 고려 사회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남겨졌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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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서긍 선화봉사 뜻 원문
고려도감은 송나라 서긍이 쓴 1123년에 쓴 고려에 관한 책입니다.이 책은 외국인이 고려에 대해 쓴 생생한 기술이어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고 있습니다. 해설본을 직접 볼 수 있으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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